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합중국 해병레이더스 (문단 편집) == 화려한 전공을 세우다 == 이 레이더스 부대는 각종 지원과 보급 면에서 해병대 내에서 최우선 순위 대접을 받았다. 마치 요즘의 특수부대들마냥 요청만 하면 각종 신무기가 보급되었고, 해병대 내 타 부대 정예 인원 차출에도 우선권을 가졌다. 심지어 칼슨 중령은 2레이더스 대대 내에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편제(기존 9인 편제 대신 10인 편제의 새로운 [[분대]] 구성, 2개 해병소대로 구성된 중대 6개로 대대 재편 등)를 테스트하기도 했다. 진주만 기습 이후 엄청난 속도로 규모를 확장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해병대의 입장에서 보면, 단일화된 프로세스로 공장처럼 부대를 찍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한땀 한땀 공들여 수공업 명품을 만들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셈. 해병대의 심정이 어쨌건간에 숙련된 정예병 위주로 강훈련을 통해 공들여 키워낸 이 경보병대대는 확실히 쓸모가 있었다. 가벼운 편성으로 잠수함을 통해서도 손쉽게 적지 한가운데 투입할 수 있는 이들 레이더스 부대는 사령부에게 매우 간편하고 쓰기 편한 옵션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2대대의 일부 중대들을 미드웨이섬 방어에 투입하는 한편으로, 일본령 길버트 제도의 마킨 환초에 잠수함을 통해 2대대를 투입시켜서 소규모의 주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성공리에 회수하기도 하였다. 이 때 2대대의 마킨 기습은 영웅적인 전공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되었고, 1943년에는 전시 홍보영화로 영화화도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전체 전황에 미친 영향이 미미한데다가, 막상 기습 과정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도 칼슨 중령의 오판으로 일본군에 항복할 뻔 하는 등, 들여다보면 좀 허술한 구석이 많다.''' 아무래도 아직 초창기이다 보니... 그래도 다들 영웅과 승리에 목말라하던 개전 초라 흡사 [[미 육군]]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과 비슷하게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미드웨이 공략에 나서는데 일정부분 기여하면서 전황에 긍정적인 영향을 약간이라도 미친 둘리틀 특공대에 반해, 제2레이더스대대의 마킨 기습은 그 작전 자체만으로는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본군이 외곽 기지의 취약점을 깨닫고 방어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본군이 마샬 제도, 길버트 제도의 방어를 강화하여 이후 [[타라와 전투]]에서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 마킨 기습의 상세한 내용은 [[대사(의사)|대사]]의 태평양전쟁 블로그의 관련항목 [[http://blog.naver.com/imkcs0425/60172161465|1편]], [[http://blog.naver.com/imkcs0425/60172238978|2편]] 참조. 아이러니한 일은 레이더스부대 최대의 전공이 이러한 기습작전이 아닌 방어전에서 세워졌다는 점이다. [[과달카날 전역]] 초기, 메릿 에드슨 중령이 이끄는 제1레이더스 대대는 툴라기 섬 점령에 투입되었다가 이후 과달카날 섬으로 재배치되었는데, 과달카날 전역 지상전 최대의 격전이자 승부처였던 42년 9월 13일 피의 능선 전투에서 가와구치 기요타케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 주공을 패퇴시키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일개 대대가 하룻밤의 전투로 대대장 에드슨 중령을 포함 2명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으니 이 전투의 중요성과 그 격렬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마킨 환초 기습 이후 이런저런 소규모 작전에 동원되었던 칼슨 중령의 제2대대 역시 과달카날 전역에서 무려 29일간(1942. 11. 6 ~ 1942. 12. 4)의 연속된 적지 강행정찰을 수행, 정찰기간 동안 5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전사자 16명, 교환비 30:1이 넘는 놀라운 전과를 세워 [[워싱턴 D.C.]]의 [[높으신 분]]들을 기쁘게 했다. 미 해병대 수뇌부로서는 여전히 교리상 존재의의가 불분명한 레이더스 부대의 존재 자체가 마뜩찮았지만, 어쨌건 아직 본격적인 미군의 쇼미더머니가 시전되기 전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시기에 레이더스부대가 큰 활약을 보인 것은 사실이고 대통령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따라 제3, 제4레이더스 대대가 잇달아 창설되어, 1943년 3월에는 이 4개 레이더스대대를 묶어 제1레이더스연대로 확대 재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레이더스 부대의 [[산파]]이자 해병대에 홍군식 전술을 도입하고자 애썼던 에반스 칼슨 중령은 과달카날 전역 이후 말라리아와 황달에 걸려 본토로 후송되는 바람에 레이더스 부대를 떠나게 된다. 이후 칼슨 중령은 다시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귀하지 못하였고, 칼슨이 공들여 육성한 2레이더스대대 역시 그 후에 전통적인 일반 보병부대의 임무와 편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래도 칼슨 중령은 해병대에 [[겅호]], 그리고 본인이 도입한 분대 편제(분대장+3인1조의 화력팀 3개조로 구성된 10인 분대)를 유산으로 남겼다. 미군이 [[호주]]와 [[뉴칼레도니아]]가 지척인 [[뉴기니]]와 남부[[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벌이던 1942년~1943년 중반까지, 레이더스부대는 애초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존재가치를 뽐냈지만, 1943년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